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라타 제국 (문단 편집) == 개요 == 1674년 마하라슈트라 서해안 지방의 토후였던 '''[[시바지 본슬레]]'''(슈와지 보살레)가 다른 마라타 토후들의 추대를 받아 '''차트라파티'''[* '양산(차트라)과도 같은 군주(파티)'라는 뜻으로, 여기서 '양산'은 세상을 덮어 보호하는 군주의 상징이다. 마라타의 군주(황제)가 군주 명칭으로 사용했다. ~~직역하면 [[수호군주]]~~]로 등극하면서 건국된 국가이다. 1707년 무굴 황제였던 [[아우랑제브]]의 사후, 페슈와(대재상) '''[[바지라오 1세|바지라오 발랄 바트]]'''[* 20세의 젊은 나이에 집권하여 40세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총 43차례의 전투에서 무패를 자랑했으며, 마라타의 영토를 10배 가량 넓히는 데 기여했다. 그의 로맨스를 다룬 발리우드 영화 <바지라오 마스타니>가 2015년말 개봉하여 흥행했다.] 지휘하에 [[무굴 제국]]의 영토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여 18세기 중반에는 인도 아대륙 중북부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전성기 때 영토는 오늘날의 파키스탄 북부 [[페샤와르]]에서 서쪽으로는 웨스트 벵갈, 남쪽으로는 [[타밀나두]] 지방에 이르렀다.[* 위의 지도에서 수틀레지 강 동편의 라자스탄과 펀자브 일대는 마라타의 직할령은 아니었으나 제2차 영국-마라타 전쟁 이전까지는 사실상 그 영향권에 속했고, 마라타에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나 1761년 아프간계 [[두라니 왕조]]와의 [[파니파트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펀자브 지역에서 기원한 [[시크 왕국]]이 부흥하면서 북부 영토를 대부분 상실하고, 벵골과 인도 동해안으로 침투해 온 [[영국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영국과의 1차 전쟁에서는 마라타 측이 승리를 거두며 동인도회사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었으나, 19세기 초반에 벌인 2차전쟁에서는 국력을 크게 소모했고, 3차 전쟁에서는 완전히 영국에 패배하여, 결국 [[대영제국]] 산하 [[동인도 회사]]의 지배를 받는 여럿 토후국들로 나뉘어져 멸망했다. 마라타 동맹은 인도 역사에서 두 가지 주요한 의의를 가지는데, 첫 번째로 힌두교의 부흥과 무슬림 지배 계급의 몰락의 분수령이 되었고, 두 번째는 인도 역사의 중심지가 내륙에서 해안 지방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중앙아시아의 육로 무역이 쇠퇴하고, 해상 무역이 증가하는 추세에 따라 마라타 동맹의 중심 지역들은 상당수가 해양 도시였다. 인도 자체가 중동, 유럽과 교류가 잦기도 해서 서유럽의 군사제도를 도입하고 유럽식 대포를 자체생산하기도 했다. 포르투갈식 군제개혁을 통해 장창-화승총 테르시오를 만드는가 하면 영국 레드코트를 상대로 라인배틀을 벌이고, 심지어 마라타 포병대가 영국 포병대를 화력으로 찍어 누르는 일도 있었다(다만 해당 전투에서는 영국 중기병대의 활약으로 영국이 승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